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멕시코 혁명 (문단 편집) == 3차전: 농촌 vs 도시 == 혁명군은 승리했지만 비야•사파타파와 카란사•오브레곤파의 대립은 피할 수 없었다. 1914년 10월 혁명군의 대표자를 모아 '''아과스칼리엔테스 회의'''가 열렸다. 비야와 사파타는 이 회의에서 공동전선을 조직해 다수를 점한 사파타의 <세라야 강령>을 혁명의 공동강령으로 채택하여 카란사와 비야의 동시 퇴진을 결정했지만 카란사는 이를 무시하고 멕시코시티에서 베라크루스로 달아나 비야•사파타 파와의 전투에 돌입했다. 1914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카란사•오브레곤파가 철수한 수도 멕시코시티에 사파타파와 비야파가 차례로 입성했지만 두 사람 모두 멕시코 시티에서 정권을 잡을 의지가 없어 바로 수도를 포기했다. 카란사파는 힘들이지 않고 수도를 탈환하여 다시 비야파를 쫓아 서쪽으로 진격했다. 카란사파와 비야파는 1915년 4월 5일부터 6일, 13일과 14일에 걸쳐 과나후아토 주 세라야 전투에서 격돌했다. 카란사파는 오브레곤이 지휘하는 북서사단 병력 약 11,000명에 화포 13문과 기관총 86정이 있었고 비야 파는 북부사단 병력 22,000명에 야포 30문 이상으로 병력은 비야의 북부사단이 우세했지만 오브레곤군의 기관총 86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4월 5일과 6일 전투에서 오브레곤군이 패배하여 후퇴하는 듯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비야가 자랑하던 기마돌격 전술을 기관총으로 격퇴함으로서 반격에 성공했다. 이어서 13일과 14일의 전투에서는 오브레곤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새로운 전법을 도입하여 전장에 참호와 철조망을 치고 비야의 기마돌격을 저지한 후 기관총으로 섬멸했다. 비야군은 붕괴하여 전사 4,000명, 포로 5,000명을 내고 화포를 모두 상실한 채 퇴각했다. 멕시코 혁명의 승패를 가른 이 전투에서 카란사파는 5월에 트리니다, 6월에 레온을 점령하고 비야의 북부사단을 완전히 와해시켰다. 하지만 6월의 레온 점령 당시 비야 파가 쏜 대포가 오브레곤의 진영을 때리면서 오브레곤은 한쪽 손을 절단당하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카란사파 내에서도 새로운 대립이 생겨났다(...). 카란사파의 장군들이 제정한 헌법은 카란사의 생각과는 달리 사유재산 절대사상을 부정하고, 대토지 소유자에게 국가가 개입해 농지개혁을 추진하는 길을 열면서 노동자의 권리보호를 주장하는 등 카란사의 적이었던 비야와 사파타의 주장을 대폭 수용한 진보적인 것이었다.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을 규합해 군을 실제로 이끈 장군들은 뒤에서 명령만 내린 카란사와 달리 멕시코의 민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훗날 멕시코 정치체제의 기본이 된 1917년 헌법이다. 혁명정권은 강력한 기반을 가진 [[가톨릭]] 교회를 적대시하여 정교분리 정책을 추진했고 외국인 사제의 활동과 종교교육 이외의 교육 관여가 금지되었다. 카란사는 사실상 이 헌법의 내용을 무시하고 정치를 진행했다. 비야파가 와해된 후 모렐로스 주의 산 속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던 사파타는 1919년 4월 10일 '사파타파로 돌아섰다'며 접근한 정부군 장교에게 피살되었다. 그 사이 카란사의 구심력은 급속히 저하되어 실질적으로 비야 파와의 전투를 지휘하고 유연한 사고로 농지개혁 등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던 오브레곤 장군의 인망이 높아졌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카란사는 오브레곤을 정부에서 쫓아내고, 그런 후 대통령에 입후보하려는 것도 방해하여 그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1920년 1월 오브레곤은 고향인 소노라 주로 도주하여 4월에 카란사에 대한 반란을 선언했다. 거의 모든 장군들은 물론 비야파와 사파타파의 잔당도 오브레곤파에 가세했다. 약 한 달 만에 카란사 대통령은 수도인 멕시코시티에서 달아나 항구도시인 베라크루스로 향했지만 베라크루스 주지사도 오브레곤파여서 카란사는 푸에블로 산 속으로 도망치다가 반란군에게 피살당했다. 최종적으로 승자가 된 오브레곤은 1920년 6월의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그 사이 오브레곤은 비야파와 사파타파의 잔당과 평화협상을 체결하여 두 파 모두 무기를 놓았다. 허나 판초 비야는 1923년 7월 23일 비서와 경호원을 태운 자동차를 스스로 운전하던 중 피살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 오브레곤의 후속 대통령의 자리를 둘러싸고 그의 충실한 부하로 오브레곤이 정식으로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임시 대통령으로 일한 적이 있던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Felipe Adolfo de la Huerta Marcor) 재무장관이 반란을 일으켰다. 일시적으로 데라우에르타가 우위를 점했지만 결국 오브레곤이 승리했다. 이 반란을 끝으로 멕시코 혁명의 전란은 이후 크리스테로 전쟁 등 약간의 전투 외엔 거의 종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